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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폰 게리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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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토 폰 게리케는 1602년 독일에서 태어나, 법학, 공학 등을 공부하고, 1646년부터 마그데부르크 시장을 역임하며 30년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 재건에 힘썼다. 그는 진공 펌프를 발명하고 마그데부르크 반구 실험을 통해 기압의 힘을 입증하는 등 진공과 대기압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으며, 세계 최초의 정전기 발전기를 발명하는 등 정전기 연구에도 기여했다. 폰 게리케의 업적은 그의 저서 『신기한 실험들』에 상세히 기록되었으며, 그의 이름을 딴 오토 폰 게리케 마그데부르크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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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폰 게리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앙셀무스 반 훌레(1601–1674)의 초상화를 바탕으로 한 오토 폰 게리케의 판화
앙셀무스 반 훌레(1601–1674)의 초상화를 바탕으로 한 오토 폰 게리케의 판화
출생 이름오토 게리케
출생일1602년 11월 20일
출생지마그데부르크, 마그데부르크 대주교관구, 신성 로마 제국
사망일1686년 5월 11일
사망지자유 한자 도시 함부르크, 신성 로마 제국
국적독일
분야물리학자, 정치인
소속 기관해당사항 없음
모교해당사항 없음
지도 교수해당사항 없음
지도 학생해당사항 없음
알려진 업적진공
진공 펌프
정전기 발생기
마그데부르크 반구
풍향계
다시미터
참고
발음 (영국)/ˈɡɛərɪkə/
발음 (미국)/ˈɡ(w)ɛərɪkə, -ki/
발음 (독일)/ˈɔtoː fɔn ˈɡeːʁɪkə/

2. 생애

오토 폰 게리케는 독일 마그데부르크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27] 독일의 여러 대학에서 법학과 공학(수학)을 공부했으며,[27]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지에서 유학했다.[27] 1627년 마그데부르크 시의원이 되었으나,[27] 30년 전쟁 중인 1631년 마그데부르크 약탈을 피해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군대에 입대했다.[27]

1646년부터 마그데부르크 시장을 역임하며 30년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 재건에 힘썼다.[27] 1686년에 사망했으며,[27] 오토 폰 게리케 마그데부르크 대학교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오토 폰 게리케는 마그데부르크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6] 15세까지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으며,[7] 1617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법학과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3] 1620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학업이 중단되자, 잠시 집으로 돌아온 후 헬름슈테트 대학교, 예나 대학교, 라이덴 대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3] 라이덴 대학교에서 그는 처음으로 수학, 물리학, 군사 공학 수업을 들었다. 이후 프랑스와 영국으로 9개월간의 그랜드 투어(Grand Tour)를 통해 학업을 마무리했다.[3]

2. 2. 가족

오토 폰 게리케는 1626년 마르가레테 알레만과 결혼하여 세 자녀(안나 카타리나, 한스 오토, 야코프 크리스토퍼)를 두었으나, 마르가레테는 1645년 사망했다.[4][8] 안나 카타리나와 야코프 크리스토퍼는 모두 유아기에 사망했고, 1652년 폰 게리케는 도로테아 렌트케와 재혼했다.[4][8]

2. 3. 정치 경력

마그데부르크 약탈, 신성 로마 제국군이 1631년 4월 통행료 요새를 점령하고 교외로 진입하다


게리케는 마그데부르크의 유력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교육을 잘 받고 폭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평생 동안 시의회 의원이었으며, 여러 차례 시장으로 임명되었다.[9] 1626년, 오토 폰 게리케는 마그데부르크의 정치 대표로서 경력을 시작하여 시의회에 합류했다.[3] 그러나 1618년 30년 전쟁이 발발했고, 이 길고 파괴적인 갈등은 곧 마그데부르크에도 영향을 미쳤다.

몇 년 후, 그는 틸리 백작이 이끄는 신성 로마 제국 가톨릭 동맹 군대가 마그데부르크를 포위하고 봉쇄하기 전에 도시를 탈출했다. 이 공격은 마그데부르크 약탈로 절정에 달했는데, 1631년 5월 제국군은 도시 성벽을 무너뜨리고 약탈을 자행했다. 25,000명이 넘는 주민의 약 80%가 사망했고, 광범위한 화재로 총 1,900채의 건물 중 약 1,700채가 파괴되었으며, 그중에는 게리케의 모든 개인 재산도 포함되었다. 1631년 마그데부르크로 돌아온 그는 학문적 엔지니어 교육 덕분에 재건 위원회의 임명자로 지정되었다.[9][3]

그는 맥주 양조장 주인이 되어 새로운 개인 재산을 얻고 도시를 위해 부를 축적하려 했다. 1646년, 마그데부르크의 부르고마이스터로 선출되었는데, 이 직책은 시장보다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1678년 은퇴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40년 동안 재임하면서 그는 수많은 외교 사절단을 맡아 유럽의 법원과 의회를 방문하여 권력자들을 만나고 공작, 왕, 황제 등에게 연설했다. 1666년, 오토 폰 게리케는 레오폴트 1세 황제에게서 작위를 받았는데, 이는 그의 이름 앞에 "폰"이라는 접두사를 추가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성을 "Gericke"에서 "Guericke"로 바꾸었다.[3][4][10]

1631년, 30년 전쟁으로 마그데부르크에서 탈출하여 스웨덴 구스타프 2세 아돌프 국왕의 군대에 입대했다.[27] 1646년부터 독일 마그데부르크 시장을 역임하며, 30년 전쟁의 마그데부르크 전투로 폐허가 된 마그데부르크의 재건에 힘썼다.[27]

2. 4. 외교 활동

오토 폰 게리케의 첫 외교 임무는 1642년 9월 마그데부르크를 대표하여 드레스덴에 있는 작센 선제후의 궁정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폰 게리케의 임무는 작센 군 사령관으로부터 마그데부르크에 대한 더 관대한 처우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다.[11][10] 1648년, 그는 30년 전쟁을 종식시킨 평화 조약 대표단에서 도시를 대표했다.[11][10] 1654년 레겐스부르크로의 외교 임무 중에 게리케는 자신의 공기 펌프 발명품을 선보여 만날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며 자신의 과학적 업적을 홍보하려 했다.[11][10] 종종 위험하고 지루하기도 한 외교 임무는 앞으로 20년 동안 그의 많은 시간을 차지하게 되었다.[11][10]

그의 사생활은 많은 부분이 불분명하지만 동시에 전개되고 있었다.[11][10] 오토 폰 게리케는 자신의 공식 지위와 과학적 지식을 서로 돕도록 활용하여 도시의 정치적 목표에 봉사했다.[11][10] 공기 펌프와 정전기 발생기와 같은 그의 발명품 시연은 청중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정치적 소통을 개선하고 확장하기 위한 것이었다.[11][10] 필요하다면 자신의 작품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과학적, 기술적 설명을 생략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마법 능력을 믿게 하여 훌륭한 지도자를 홍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특징을 보여주었다.[11][10]

2. 5. 과학 연구와의 융합

오토 폰 게리케의 과학적 활동과 외교적 활동은 1654년 레겐스부르크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고위 관리들 앞에서 진공 실험을 시연하도록 초청받으면서 교차하게 되었다. 그는 진공 펌프를 만들어 두 개의 연결된 마그데부르크 반구에서 공기를 빼내고 각 쪽에 말 여러 마리를 연결하여 당기게 했다. 1663년 프로이센 국왕 앞에서도 이 실험을 다시 시연하여 평생 연금을 받았다.[12] 이 고위 관리들 중 한 명인 요한 필립 폰 쇤본 대주교 선제후는 폰 게리케로부터 그의 장치를 사서 뷔르츠부르크에 있는 예수회 대학으로 보냈다. 대학의 교수 중 한 명인 가스파르 쇼트 신부는 폰 게리케와 서신 교류를 하였고, 이를 통해 폰 게리케는 55세의 나이에 자신의 연구가 쇼트 신부의 책 ''Mechanica Hydraulico-pneumatica''의 부록으로 처음 출판되었다.[12] 이 책은 로버트 보일의 관심을 끌었고, 그는 이 책에 자극을 받아 공기압과 진공에 대한 자신의 실험을 시작하여 1660년 ''공기의 탄성과 그 효과에 관한 새로운 물리적 역학적 실험''을 출판했다. 다음 해 이 책은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쇼트 신부와의 서신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폰 게리케는 사본을 구입했다.[4]

1672년판
1672년판 "''Experimenta Nova (ut vocantur) Magdeburgica de Vacuo Spatio''"의 첫 페이지


자신의 연구가 처음 출판된 후 10년 동안 폰 게리케는 외교 및 행정 업무 외에도 과학적으로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자신의 대작 ''Ottonis de Guericke Experimenta Nova (ut vocantur) Magdeburgica de Vacuo Spatio''에 착수했는데, 이 책에는 진공에 대한 그의 실험에 대한 자세한 설명뿐만 아니라, 정전기적 반발이 처음으로 증명된 그의 선구적인 정전기 실험과 공간의 본질에 대한 그의 신학적 견해가 포함되어 있었다.[11][13][14][15] 1663년 3월 14일에 책을 완성했지만, 출판은 9년이나 지연되어 1672년에야 이루어졌다. 1664년 그의 저작은 다시 한번 가스파르 쇼트의 도움으로 인쇄되었는데, 그의 책 ''Technica Curiosa''의 첫 번째 부분인 ''Mirabilia Magdeburgica''는 폰 게리케의 연구에 바쳐졌다. 마그데부르크 반구 실험에 대한 가장 초기의 언급은 ''Technica Curiosa'' 39페이지에 있는데, 쇼트는 폰 게리케가 1656년 7월 22일 자 편지에서 이 실험을 언급했다고 적고 있다. 쇼트는 1657년 8월 4일 자 폰 게리케의 후속 편지를 인용하면서, 그가 상당한 비용을 들여 12마리의 말을 사용하여 이 실험을 수행했다고 밝히고 있다.[16]

1660년대는 마그데부르크 시민들의 자유 제국 도시 지위 달성에 대한 희망이 최종적으로 사라진 시기였는데, 폰 게리케는 20년 동안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마그데부르크를 대표하여 1666년 클로스터베르크 조약에 첫 번째 서명자였는데, 이 조약에 따라 마그데부르크는 브란덴부르크 군대의 주둔을 받아들이고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에게 세금을 납부할 의무를 지게 되었다.[17] 대선제후가 마그데부르크의 정치적 열망을 짓눌렀음에도 불구하고, 폰 게리케와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개인적인 관계는 따뜻하게 유지되었다. 대선제후는 과학 연구의 후원자였다. 그는 폰 게리케의 아들 한스 오토를 함부르크에 있는 자신의 거주자로 고용했고, 1666년에는 오토 자신을 브란덴부르크 의회로 불렀다. ''Experimenta Nova''가 마침내 출판되었을 때, 프리드리히 빌헬름에게 헌정하는 서문이 붙었다.[18][19]

2. 6. 말년

1677년 폰 게리케는 여러 차례 요청한 끝에 마지못해 시민 직책에서 물러났다. 1681년 1월, 당시 마그데부르크를 위협하던 역병 발생에 대한 예방 조치로, 그는 두 번째 아내 도로테아와 함께 아들 한스 오토가 살고 있던 함부르크로 이주했다. 폰 게리케는 1631년 포위 공격에서 탈출한 지 55년째 되는 날인 1686년 5월 11일(율리우스력) 평화롭게 사망했다.[27] 그의 시신은 5월 23일(율리우스력) 마그데부르크로 돌아와 성 울리히 및 레빈 교회(St.-Ulrich-und-Levin-Kirchede)에 매장되었다.[27] 마그데부르크 오토 폰 게리케 대학교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3. 과학적 업적

오토 폰 게리케의 과학적 업적은 크게 진공 및 대기압 연구와 정전기 연구로 나눌 수 있다. 그의 연구는 당시 과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기상학의 선구적인 역할도 수행했다.

게리케의 과학적 업적에 대한 체계적인 논문은 다음 세 가지 자료에 담겨 있다.


  • 가스파르 쇼트 신부의 1657년 저서 ''테크니카 쿠리오사(Technica Curiosa)''
  • 가스파르 쇼트 신부의 1664년 저서 ''Mechanica Hydraulico-pneumatica''
  • 오토 폰 게리케의 1672년 저서 ''Experimenta Nova (ut vocantur) Magdeburgica de Vacuo Spatio''[20]


위 저서에 담긴 과학 연구 및 관련 실험은 세 가지 주제로 분류할 수 있으며, 각 주제에 대해 ''Experimenta Nova''의 다음 책들이 전문적으로 다룬다.

  • 제2권: 공간의 본질과 공허의 가능성
  • 제3권: 진공 생성, 공기의 압력 및 지구 대기의 실험 연구
  • 제4권: 우주적 힘에 대한 조사[21]


1650년, 게리케는 진공 펌프를 발명하여 진공의 특성을 연구했다. 그는 진공 속에서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불이 꺼지며, 과일을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등의 실험을 했다. 또한, 마그데부르크 반구 실험을 통해 기압의 힘을 증명했다. 1663년에는 베를린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앞에서 24마리의 말을 이용한 실험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실험들은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반박하는 근거가 되었다.[27]

게리케는 기압계를 이용하여 최초로 과학적인 일기예보를 실시하여 기상학의 선구가 되었다. 그는 공기의 무게를 계산하고(1리터당 약 1.3그램), 대기압의 변동을 관찰했다.[28]

말년에 게리케는 전기에 대한 연구에 전념하여 세계 최초의 정전기 발전기인 "Elektrisiermaschine"을 발명했다.

3. 1. 진공 및 대기압 연구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에 영감을 받은 폰 게리케는 지구상에서 '무(無)'의 현상을 재현하고자 했다. 그는 처음에 나무통에서 물을 퍼내는 소방펌프를 사용하여 진공을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나무의 다공성 때문에 실패했다. 1647년, 그는 물 대신 밀폐된 공기를 퍼내는 방식으로 전환했다.[6][10]

폰 게리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충만설과 르네 데카르트의 견해를 비판하며,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는 원리가 단순한 실험을 넘어 높은 물리학 원리로 사용되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자신의 견해가 독창적이라고 주장하며, 1647년에 출판된 블레즈 파스칼의 『진공에 관한 새로운 실험』을 알지 못했다고 언급했다. 폰 게리케는 1654년 레겐스부르크에서 에반젤리스타 토리첼리의 수은 기둥 실험을 처음 알게 되었다.[5]

폰 게리케는 공간이 인간 상상의 산물이라는 견해를 논하며, 모든 객관적 현실은 창조된 것과 창조되지 않은 것 두 가지 범주로 나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공간과 시간은 객관적이지만 창조되지 않았고, 물질은 창조되었다고 보았다. 그의 공간 이해는 신학적이며, 아이작 뉴턴의 견해와 유사하다.[5]

1650년, 폰 게리케는 진공 펌프를 발명했다.[22] 그의 모델은 피스톤과 공기총 실린더로 구성되어 양방향 플랩을 사용하여 연결된 용기에서 공기를 뽑아냈다.[23] 그는 이 펌프를 사용하여 진공의 특성을 조사하는 많은 실험을 수행했다.

1657년, 그는 마그데부르크 반구 실험을 통해 기압의 힘을 입증했다. 직경 51cm(20인치)의 반구 두 개를 맞대고 내부 공기를 빼내자, 열여섯 마리의 말이 양쪽에서 당겨도 분리되지 않았다. 분리에는 약 1814.37kg 이상의 힘이 필요했을 것이다.[24] 그는 이 실험을 통해 내부 압력을 대기압의 1/25 수준으로 낮췄다.[6]

폰 게리케는 실험을 통해 "horror vacui (physics)|공포의 진공|물리영어"(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는 가설을 반증했다. 그는 물질이 진공에 끌리는 것이 아니라 주변 유체의 압력에 의해 밀려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5]

폰 게리케의 진공과 기압 연구는 ''Experimenta Nova''(1672) 3권에 설명되어 있다. 1654년 레겐스부르크 시연, 1657년과 1663년 가스파르 쇼트의 발표 등에서 그의 연구 연대기를 확인할 수 있다.

1654년 레겐스부르크에서 그는 비구형 용기가 찌그러지는 실험과, 사람들이 기밀 피스톤을 원통형 구리 용기 위로 당기는 실험을 선보였다. 1656년 쇼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폰 게리케는 레겐스부르크에서의 경험을 간략히 설명했다. 쇼트는 이를 바탕으로 레겐스부르크에서 수행되었을 열 가지 실험 목록을 제시했다. 여기에는 진공 펌프를 사용한 공기 추출, 밀폐 용기 내 불꽃 소화, 흡입에 의한 물 상승, 공기 무게 시연 등이 포함된다. ''Mechanica Hydraulico-pneumatica''에는 폰 게리케의 진공 펌프 초기 그림이 있다.

가스파르 쇼트가 제작한 마그데부르크 반구 실험의 판화


1656년 이후 10년간 폰 게리케는 과학적으로 매우 활동적이었다. 그는 쇼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는 이러한 모든 문제와 많은 다른 주제에 대해 더 낫고 명확한 이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라고 언급했다. 반구 실험은 1656년 7월과 1657년 8월 사이에 수행되었다. 그는 새롭고 개선된 진공 펌프 설계를 설명하고, 실험 시연을 위한 휴대용 기계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1663년 쾰른 선제후 도서관에서 시연이 이루어졌고, 여러 실험이 기록되었다. ''Experimenta Nova''는 1665년 서신을 포함하지만, 폰 게리케는 1663년 3월까지 작업이 완료되었다고 주장했다.

폰 게리케는 진공에 대한 혐오감이 없으며, 모든 현상은 대기압과 비물질적 능력에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구의 "보존 능력"이 대기를 유지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유체가 모든 평면에 압력을 균등하게 가한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했다.[5]

폰 게리케는 ''Experimenta Nova''(1672) 제3권 20장에서 기압계 제작과 일기 예보를 보고했다. 1661년 쇼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저는 유리관 안에서 공기 위에 떠 있는 작은 인형을 벽에 매달아 공기의 무게 변화를 관찰했습니다."라고 적었다. 1661년 후속 편지에서 그는 더 자세한 설명을 제공하며, 그의 기압계가 기상학의 길을 열었다고 밝혔다. 그는 "Elektrisiermaschine"을 발명했는데, 이는 최초의 정전기 발생기로 여겨진다.[25] 그는 아마포 실을 통한 전기 전달 실험으로 전기적 인력에 매개체가 필요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3][10]

1650년, 그는 임의의 용기에 연결하여 용기 내 공기를 배기하는 진공 펌프를 발명했다. 그는 진공 속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고, 불이 꺼지며, 과일을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등의 실험을 했다.

게리케는 기압 실험을 공개했다. 마그데부르크 반구 실험을 통해 두 반구가 쉽게 분리되지 않음을 보였다. 1663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앞에서 24마리의 말을 이용한 실험을 선보였다.

이 실험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는 가설(즉, 진공이라는 상태는 만들 수 없다는 가설)에 대한 반증이 되었고, 오랜 세월 철학자 및 과학자들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게리케는 진공이 물체를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주변 유체가 물체에 압력을 가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게리케는 기압계를 이용하여 최초로 과학적인 일기예보를 실시했고, 그것이 기상학의 선구가 되었다. 그는 용기의 배기 전후 무게 차이로부터 공기의 무게를 계산했고(1리터당 약 1.3그램으로 거의 정확했다), 계량에 사용한 저울을 그대로 두었더니 날마다 기울기가 바뀌는 것을 보고 대기압에 변동이 있음을 알았다.[28]

3. 2. 정전기 연구

폰 게리케는 저서 《신기한 실험들》(Experimenta Nova) 제4권 15장에서 정전기 연구에 대해 설명했다.[11] 1661년 11월 슈콧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제4권이 "우주적 능력"(virtutes mundanae)에 관한 것이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신기한 실험들》 서문에 따르면, 전체 저작은 1663년 3월 이전에 본질적으로 완성되었으므로, 게리케는 1663년 이전에 원시적인 형태의 마찰 전기 기계를 발명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게리케의 정전기 발생기는 철제 막대에 부착된 유황 구체를 사용하여 만들어졌다. 그는 마른 손으로 구체를 문질러 표면에 전하 불균형을 일으켜 다른 물체를 끌어들이고 밀어낼 수 있었다.[11] 그는 물체가 자신의 직접적인 경계 너머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을 "물질적 및 비물질적 능력"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게리케는 길버트의 저서 《자석과 자성체, 그리고 지구라는 거대한 자석에 대하여》(De Magnete)와 니콜로 카베오의 《철학적 자기》(Philosophia Magnetica)를 알고 있었지만, 정전기 반발에 대해서는 카베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유황 구체의 인력을 전기적 성질의 것으로, 보존 능력을 통해 작용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공기가 인력 생성에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마포 끈을 이용한 실험을 통해 유황 구체가 큐빗 이상의 거리에서도 능력을 행사하고 끌어당길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이러한 인력과 척력은 실제로 전기 전도였다.[6]

''L'electrisée'': 정전기 발생장치(1750년경 판화)


게리케는 세계 최초의 정전기 발전기(마찰발전기) "Elektrisiermaschine"을 발명했다. 왼쪽 판화는 그중 하나를 그린 것이다(1750년경).

참조

[1] 백과사전 Guericke, Otto von http://www.lexico.co[...] Oxford University Press 2022-09-00
[2] 사전 Guericke http://www.dictionar[...] Random House Webster's Unabridged Dictionary
[3] 백과사전 Great Lives from History: Inventors & Inventions Salem Press
[4] 서적 Otto Von Guerickes Neue (Sogenannte) Magdeburger Versuche über den Leeren Raum https://books.google[...] Springer-Verlag 2013-04-17
[5] 서적 Much Ado about Nothing: Theories of Space and Vacuum from the Middle Ages to the Scientific Revolution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1-05-29
[6] 서적 The Story of Electrical and Magnetic Measurements From 500 BC to the 1940s https://archive.org/[...] IEEE Press
[7] 학술지 Horror, Happenings and Highlights in the History of Vacuum Physics
[8] 학술지 Biography: Otto von Geuricke (1602–1686)
[9] 서적 Geschichte der Belagerung, Eroberung und Zerstörung Magdeburg's https://books.google[...] Good Press 2020-02-04
[10] 서적 Electricity in the 17th and 18th centuries: a study of early Modern physics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1] 서적 Draw the Lightning Down: Benjamin Franklin and Electrical Technology in the Age of Enlightenment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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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서적 Otto Von Guerickes Neue (Sogenannte) Magdeburger Versuche über den Leeren Raum https://books.google[...] Springer-Verlag 2013-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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